"외로워. 어딘가 정착하고싶어. 존재감이 없는 기분."
"연애하고싶어?"
"꼭 그런 의미만은 아니야."
"부정은 안하네. 존재감이라는 건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잖아. 그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는것 뿐이지. 존재감이라는 것을 타인으로부터 얻으려고 하는건 너무 위험해. 그리고 바보같은 짓이야. 타인은 네게 그저 너의 외부일 뿐이고, 그저 네안의 또 다른 언어일 뿐이야. 너의 기호와 취향에 의해 계속해서 분절되고 수정되어 재정립되는 관념에 지나지 않아."
"그래 알아.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결 될 일은 아니지. 정말 아닐까?"
"사람들은 대게 관념적인 어떤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물리적인 수치로 환산하고 싶어해. 얘를들면 '존재감'이라는 관념에도 '무겁다' 혹은 '가볍다'라는 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지.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라는 것도 처음엔 '친하게 되다'를 의미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정말로 '물리적인 거리'가 먼가 가까운가를 가지고 따지게 되는 것처럼 말이야. 어쩌면 '존재감'을 느끼고 싶을 때에는 당장 연인과 침대 위를 뒹굴며 '무게감'을 느끼고 마는것이 더 나을지도 몰라. 그러고서 '아 나는 존재감이 있군!' 하고 만족하고 마는거지. 그건 전적으로 인간의 나약함 때문이야. 에드워드 홀이라는 인류학자는 3.6미터에서 7.5미터 정도의 거리는 공적 관계이고, 45센티미터 정도의 거리는 가장 친밀한 관계의 거리라고 말하더군.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이지."
"그래? 그렇다면 큰일인걸, 내가 생각하는 가장 친밀한 사람은 수천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니까. 그런 건 우주적 관계 쯤 되는건가. 그리고. 너는 좀더 떨어져 앉아야겠다."
"어이쿠. 하하- 어쨌든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누군가와 가까워진다고 해서, 혹은 누군가와 침대위를 뒹군다고 해서 그 '존재감'의 문제는 해결될리 없다는 것이지."
"그래. 음. 거리야 어찌되었건, 나는 요즘 어딘가 단단한 바닥위에 한발짝 내려서고 싶은건 분명해. 그리고 외로움. 그 외로움은 단지 지금 내곁에 아무도 없다고 느껴져서 그런 것은 아닌것 같애. 어딘가 단단한 지반 위에 한발자국 내딛으려고 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나 혼자서만 해야하는 일이잖아. 그 사실이 참 외로운 일인 것 같애. 홀로 내딛어야 하는 한 걸음. 그래- 진짜 문제는, 그것이 외부에 있느냐 내부에 있느냐 하는 문제도 아니고, 가까운가 먼가의 문제도 아니고, 애초에 어딘가 내려선다는 것, 그게 두렵다는 거겠지. 어쩌면 그건 어른이 된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걸까? 왜 어른들이 말하잖아 '네 나이면 이제 자리를 잡아야지' 라고. 뭔가에 전력투구 하는 것, 변치않는 신념을 갖는 것, 결혼이라던가 하는 그런거 말야. 그런 속박과 구속은 확실히 두려운 일이니까.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정착'이라는 것이 정말 그런 속박을 의미하는 것일까?"
"잠깐, '정착'이라는 어휘를 유지하는게 좋겠어. 뭔가 이야기도 하기 전에 '정착'이라는 말을 '속박'으로 바꾸어버릴 이유는 없잖아. 차라리 '정착'보다 '멈추다'라는 말이 더 객관적이려나? 또 '내려서다' 라는 표현도 이미 뭔가 평가절하되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잖아. 어쨌든 난 그게 항상 불만이었어. 그런 불완전한 언어체계가 말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언어를 통한 사고의 불합리함' 말이지. 같은 것을 두고도 그저 결정적인 자리의 단어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너무 쉽게 바뀌어버리거든. 잘 되고 있을 때에는 착한 언어들로 좋게 생각하다가도, 마음이 안들면 금방 잔뜩 비꼬인 말로 바꾸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원했던 일들도 마치 원치 않았던 일이었다는 식으로말이야. 무슨얘기 하고 있었지? 그래, 두려움. 그래서 내 말은, 속박이든 정착이든 '어딘가에 그만 멈춰서고 싶은' 그 성향, 그 의지 자체에만 주목 하자는 이야기지."
"응. 그건 그래. 잘. 짚어. 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불완전한 '언어'로 생각도 하고 선언도 하고 약속도 하지. 그리고 그런 것들에는 늘 말썽이 따르지. 반면 본능적인 행위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거나, 소변이 마려우면 소변을 보는식의 일들은 참. 명쾌한것 같애."
"섹스또한 그렇지. 나는 그와중에도 말을 많이 하는 편이긴 하다만."
"으응? 외로운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닐까?"
"응? 아니. 어쨌든 자- 내가 너의 두려움에 대해 설명해 볼께. 그 이유는 이런게 아닐까. 자, 잘 봐. 여기 카페라떼라가 있고, 그리고 여기엔 트리플톨라이트워터아메리카노가 있지. 넌 카페라떼는 물론, 카페모카도 종종 마시긴 했지만, 어느날부터는 트리플톨라이트워터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했어. 쓴맛을 알게되어서일 수도 있고, 남들은 잘 먹지 않으니까, 혹은 그저 예쁜 캐쉬어 앞에서 유창하게 특별한 주문을 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르지. 그러던 어느날, 이 커피맛에 심취해 있던 너는 이벤트에 당첨 되어 한가지 음료를 평생! 먹을 수 있는 쿠폰을 받게 된거야. 단 한가지 음료만을. 그래서 넌 그 쿠폰 위에 그 한가지 음료의 이름을 적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거지. 단 한가지의 음료만을! 하지만 너는 아마도-"
"망설이겠지. 하지만 뭐. 단연. 트리플톨라이트워터아메리카노-"
"흐흐. 그래 그러시던가. 하지만 언젠가는 카라멜마끼아또같은 단맛도 느끼고싶을테고, 가끔 배고플때엔 카푸치노를 마시고 싶을테니까- 넌 펜을들고 한참을 고민해야 하겠지. 네가 비록 지금은 그 트리플톨라이트워터아메리카노의 쓴맛을 최고로 생각한다해도말이지. 예가 좀 웃긴것 같긴 하지만, 시사하는바가 아예 없지는 않아. 내가 보기에 넌 마치 인생의 노선을 계산대 앞에서 음료 고르는것처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그래 무슨말 하는지 나도 알아. 아직 절실하지 않아서, 아직 배고프지 않아서 이런고민도 할 수 있는것이라고 얘기하고 싶은거겠지.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여유이고 게으름이라고 말하고 싶은거겠지. 너마저. 며칠전에 친구에게 이런 푸념을 했었어. 요즘의 나는 '의욕에 대한 의욕조차 의욕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있다고. 아무 일에도 의욕을 보이지 않아- 네 말대로라면 나는 어쩌면 절실함을 갖기 위해서, 배고픔을 맛보기 위해서, 곤경에 처하기 위해서 쓴맛을 좀 더봐야 한다는 이야기잖아. '인생이 너무 달다. 그러니 엑스트라샷을 하나 더 추가해야겠군!' 이건 더 웃긴 이야기가 되어버리잖아."
"음. 거 말 되는군. 유브 갓 메일이라는 오래된 영화 기억나? 갑자기 생각나는게 있는데, 톰행크스의 일상을 보여주는 대목에 이런 독백이 나와 "도대체 자신이 뭘하며 살고 있는건지 자기가 누구인지 도통 모르는 사람이 2달러 95센트를 내고 사가는 것은 그저 한 잔의 커피가 아니라. 확실하게 정의된 자신에 대한 느낌, 즉, 큰 컵에 담긴, 카페인 없는, 카푸치노라는 정체성이다." 라고."
"아! 잘도 기억하고 있군, 노라 애프런이라는 사람이 각본을 썼던가- 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을 썼던- 그게 우리 고등학교 때 영화였으니. 지금 우리의 비유도 꽤 낡아빠진거였군. 쳇."
"훗. 질투하긴-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있어. 왜 자꾸만 너는 네가 지금 계산대 앞에 서있다고 믿는걸까. 왜 무엇인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믿고 있는는거지? 네가 단지 육개월 동안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아니면 누군가가 자꾸만 너에게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라고 귀찮게 물어보기라도 하는거야?"
"글쎄- 모르겠어. 내가 손님이고, 내가 계산대이고, 내가 점원이기도 한것같애. 어쩌면 좋을까. 그저 좀 어디엔가 부딪치기라도했으면 좋겠네- <홀로 내딛어야 하는 한 걸음> 정말 그런걸까. 우리는 지금 무슨이야기를 했던거지?"
"글쎄, 너의 게으름에 대한 이야기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