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야?"
"응."
"정말?"
"어-"
"정말이지?"
"그래! 욘석아 너는 그렇게 꼭 세번을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거니? 모든 사람들이 너 처럼 스스로의 결정에 대해 불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
그래. 재미있었다니 다행이다. 난 사실 재미없었거든. 영화 중반에 이미 반전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뻔히 보였거든. 기억 안나? 반전이 이루어지기 한참 전에 극적인 하나의 미장센이 이미 결정적인 범인을 지목하고 있었는데 말야."
쳇. 미장센 좋아하시는구나. 반전이 예고된 영화에 칠천원을 지불하고서 너는 분명 영화를 보는 내내 그것을 예측하느라 정작 영화에는 몰입하지 못했을테지. 내 생각에 너는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그것을 깎아내릴 준비부터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가만. 너는 근데 왜그리 사사껀껀 의심이 많니?"
"글쎄, 그건 말이지 예기를 하자면 길어. 감정이라는 것은..."
"어휴 또 그 얘기 하려고? 감정. 감정은 의도되어진다. 그 얘기를 몇번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래 네가 말하는 '감정은 의도되어진다' 라는 명제와 지금 네가 영화를 보고 돈 아까워 하는 것과 무슨관련이 있다는 거야? 들어나보자."
"예민하긴. 쯪. 그래 어디한번 들어보기 전에 질문하나 하자. 넌 '의도된 감정' 이라는 것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니? 예를들어, 그럴리는 없겠지만, 너를 좋아하고 있다고 믿었던 한 남자가 사실은 모든 여자들에게 같은 양의 미소를 던지고 같은 품질의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화가나는일이 아니겠어- 예가 좀 선정적이긴 하다만."
"'같은 품질의 친절' 좋아하는구려. 대답하기 전에, 네 질문 속에서 '당연히 부도덕하지' 라는 대답을 얻고자 하는 석연치 않은 의도가 강하게 풍기는구나. 그래, 네가 원하는 대답으로 격한 결정을 하도록 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의도된 감정은 부도덕하지! 그런걸 아마 위선이라고 하지 않던가?' 잘했지? 바라는 대답 격하게- 대답하기 놀이. 어디 준비 된 다음 이야기를 해봐."
"좋아. 역시 너하고의 대화는 언제나 만사가 수월하구나. 에- 그러니까. 음 조금 복잡하군. 아 아 기다려봐 이야기 할 수 있어. 그래 그러니까 관계 속에서 우리들은 종종.."
"욘석아. '우리들은' 이라고 말하지 마. 제발. 어떻게든 일반화하려는 저 심보 으휴."
"어. 어.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관계들 속에서 <나는> 종종, 아니 늘 그렇지만 누군가는 상처를 주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기도 하잖아. 그런데 내가 누군가로부터 감정적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그 것에 대한 보상을 바래서는 안된다는 거야. 그럴 권리는 없다는 거지."
"그렇게 이야기 하는걸 보니 그러는 너는 상처를 주는 쪽이라고 생각하나보네. 쳇. 넌 아마도 이런 얘길 하려는것 같은데- 과실은 상처를 준 쪽에 있는것이 아니라 상처를 받는 쪽에서 일방적으로 '감정이 진실되다는 신뢰'를 준 쪽에 있다는 식의, 그런 이야기- 그리고 네가 아까 말한 예에서 처럼, 어떤 남자가 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촌스럽게 순순히 믿었다' 라는 데에서부터 이미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있다.' 라고 말하려는거 아냐?"
"어. 응. 휴. 그러니까 내 말은,"
"으악 싱거워. 뻔해. 진부한 결론!"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누군가로부터 기만된 감정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마치 영화가 재미 없었다고 해서 애초에 지불했던 칠천원을 돌려달라고 티켓부스에서 떼를 쓰는 사람과 다를게 없이 구차한게 아니냐는 거지."
"교묘하게 연관짓는 솜씨가 마음에 든다. 그래서 애초에 네가 질문했던 것에 대한 대답은 뭐야? '의도된 감정은 부도덕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결론?"
"근데, 그저 그런 결론만 얘기하려던 것은 아니야. 난 그게,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기반으로 가지고, 사는 사람은 모든 것들에 있어서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거북한 삶을 살게 된다는 거지."
"그게 뭐고, 모든 것은 뭐야 도데체. 아직도 그 버릇 못고쳤니? 대명사로만 말하기야? 오랫만이라 반갑긴 하다만."
"그랬나? 응 그러니까, 나는- 그래 내얘기야. 제길. 나는 말이야 요즘 그런 사고방식. 그러니까 '감정은 의도되어진다' 라는 사고방식 때문에 정말 곤경에 처해있어. 거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 누구를 만나게 되든 도무지 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는거라. 예를들어 어떤 일 때문에 고민하고 슬퍼하는 친구를 만났을 때, 그 친구를 동정하며 안쓰러워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 친구보다 더 슬픈 내 이야기를 꺼내서 위로해줘야 하는건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이상하기 짝이없는 표정과 말투가 되어버린다는 거지."
"그건- 네가 원래 말을 잘 못해서 그래. 하하 얼굴표정 변하는 것 좀 봐. 근데 그건 전적으로 네 관점에서 다른사람을 보기 때문인거 아냐? 네가 말하는 그 상황은, 그 슬퍼하는 친구 또한 자신이 슬퍼하는 감정을 스스로 연출했을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에 동조해 주어야 할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잖아. 휴- 숨 한 번 쉬고. 처음의 비난으로 돌아가자. 넌 왜그렇게 의심이 많니?"
"그래. 그래? 그런가? 아니야. 아- 아 내 논점을 흐리지 말아줘. 하던말 계속 하고 말테야. 근데, 그게 관계 속에서의 부자연스러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래 그런 의심많은 성격 탓에 말이지. 나 자신에 대한 불신도 굉장해서- 도데체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기분이라는 거야. 나는 '감정이 의도된다' 라는 생각과 더불어 '의지'나 '의욕' 또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지경이거든."
"그건- 니가 워낙 게을러서 그래."
"근데, 난 어려서부터 TV에서 방영되는 인간시대류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누구나가 자신의 삶에서 인간시대 주인공들처럼 극적인 계기를 가져야만 하고, 극적인 계기를 통해서 자신이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을 당연히 가지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난 안그렇더라고. 좋아하는 일은 고사하고 그 어느것에도 의욕을 보이지 않아. 내겐 '무엇'에 의욕하느냐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어떻게' 의욕을 가질 수 있느냐가 더 시급한 문제가 되다보니까 '의욕에 대한 의욕'조차도 의욕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라니까."
"그래. 그래. 넌 게으른게 분명해. 다큐멘터리는 보통 60분짜리가 많지. 60분 안에 한사람의 인생을 '볼만하게' 표현 하기 위해서 방송국에는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있고, 영상 편집자가 있는게 아니겠어? 싱거운 계기도 극적으로 만들어질테고, 분명 적당히 극적인 플롯에 그들의 인생을 끼워맞춰야 했겠지. 그런것만 보고 자랐으니 쯪쯪. 근데 말야, 전에 너하고 같이 본 영화 말야 '웨이킹 라이브즈'. 거기서 누군가 말했지. 가장 일반적인 인간의 특징은? 공포인가?"
"게으름인가- 라고 말했지."
"그래. 어휴 잘한다. 넌 게으른거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날 우리는 벡스 6병을 하나 더 준비해야 했어. 하여튼, 난 요즘 우리 어머니를 보면서 느끼는게 한가지 있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어머니가 가끔 나를 서운하게 만들기도 하거든. 한번도 나에게 그런 요구를 해본적이 없는 분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나니까 경제적인 수입원이 없다는 것에 대해 너무나 불안해 하시는거야. 내가 보기에 통장에 잔고는 넉넉한데도 말이지. 그래서 그러신지 가끔은 내게 무리한 요구를 하시기도 하고, 다그치기도 하고 그러시거든."
"무리한 요구가 뭔데? 그리고 너희 어머니는 그럼 예전엔 그렇지 않으셨어?"
"응. 무리한 요구란 제발 좀 정.상.적인 삶을 살라는 강요지. 뭐 얼른 돈 벌고 자리 잡으라는 얘기지. 원래는 아버지가 그런 분이셨지. 아버지가 워낙 그 역할, 늘 다그치고 혼내는 악역을 수행하셨으니까- 어머니는 늘 내편이셨거든. 그런데 난 지금 애처럼 그런 어머니가 밉다는 얘기를 하려는건 아니야. 잘 표현하지 않았던 어머니, 당신의 위기감, 불안함 같은 것들에 대해서 그제서야 그런 방식으로 느낄 수 있었다는 거지."
"그렇구나."
"괜히 침울해질 필요 없어. 그러고보니 너 정말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 어정쩡하게 찡그린 그 표정은 뭐니. 난 지금 우울한 감정을 의도한게 아니니까 너도 이 기회를 통해 자연스러워져보렴. 그래. 그래- 잘한다. 그러니까 거기서 내가 느낀건 그거야. 이런 나도 대명사로 말하네? 어머니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의 생에 대해 느끼시는 불안. 어쩌면, 생. '생 자체에 대한 불안.' 자 따라해봐 생."
"생!"
"응 생을 살고 있는 것 자체가,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생에 대한 강한 의욕'이 아니고서는, 그것이 없고서는 불가능한게 아닌가 싶었다는 거지. 그 생이라는 것이 60분짜리 인간시대인지 인간극장인지에 나오는 삶처럼 극적일 필요는 없다는 거지. 극적인 인생. 열정적인 인생. 뭔가에 미친듯이 빠져있는 인생만이 강한 의지와 강한 의욕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거지. 그저 살고있는 것 만으로도-"
"응. 그저 살고 있는 것."
"응 그래서 내가 하고싶었던 말은."
"뭔데?"
"넌 몹시 게으르고 나약한 사람이라는 거지. 어쩌면 너는 게으른 너를 구제하기 위해서, 네가 생을 살기 위해 충분한 만큼의 의욕을 가지고 있다고 외칠 수 있기 위해서, 지금 당장 티켓부스로 돌아가서 영화가 재미없었다고 구차하게 발을 동동 구르면서 환불을 요청하는 성의를 보여야 하는게 맞는지도 모르지."
"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