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필적 숙명 (未必的 宿命)

머리 위엔 거대한 궤도가 그어져 있으며 그 아래로는 하얀 심연이 아찔하게 펼쳐져있다. 눈앞엔 경계를 알수없는 지평이 이유도 허락도없이 나의 레일을 아득하게 집어삼키고있다. 원경에 가까와질수록 좁아진 레일은 나침반처럼 마치 어딘가를 지향하는듯 보이고,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서 끝나는지, 그 어디에 도착했다는 자들은 이미 지나가고 없지만. 그들이 적당히 그어놓은 하루와 이틀이라는 지표를 잡아당겨 그 어디로 가고 있는것이다. 겁쟁이 인류는 그와 비슷한 수없이 많은 눈금을 새겨놓았지만. 나는 잘 보지도 않는다. 단지 오늘이라는 패달위로 내일만큼의 무게를 더하여 조금이나마 나아가면 족할 뿐. 더 어릴적엔 쓸데없이 많은 내일을 더하여 속력을 내어 그 어딘가에 가까워진다 믿었지만, 내일은 또다시 오늘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고나서 부터는 따분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부터인가 가까와지는 한 줄기 다른 레일을 발견하게 되었고. 스무해 넘도록 이유도 모른채 궤도를 질러온 터라 지치고 외로웠던 나는 어느날 부터인가. 심연을 뚫고 다가오는 너의 레일을 기다리게 되었고. 너와 가까와 지는것이, 하루와 이틀이라는 지표보다 더 가치있고 내일의 무게를 재는것보다 중요하게 느껴졌다. 바꿀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레일을 두드리며 너에게 가까와지길 소원했고. 믿을수 없겠지만, 어쩌면 조금은 나의 레일은 나의 의지대로 조금은 움직인듯 했다. 자신감에 넘쳐올라 정해진 눈금조차 마음대로 바꾸어 놓을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언제인지 모를 시간에 나는 너와 이야기를 나눌수 있을만큼 가까와 진것을 깨달았고. 우리는 그간 힘겹게 밟던 오늘과 무겁게 올려놓던 내일조차 놓아버린채 적당히 상쾌한 속도를 공유했고, 영원할 듯 나란한 방향을 공감했다. 우리의 간극은 더없이 여유로왔으며 그 사이로 쾌적한 이유를 가진 바람이 불어왔고. 너와 나는 허무하게 펼쳐진 백색 심연 위로 마주앉아 발을 구르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날 아침, 불안한 표정으로 너는 레일을 잇는 고리를 점검하기 시작했고. 나는 애써 화난 표정을 감추고 널 맞이하려 했지만, 너는 다시 너의 패달을 점검한다. 그제야 나는 서로를 추락시킬만큼 위태로운 각도로 마주선 우리의 좁은 절벽을 발견하였고. 그 틈에선 어느새 하얀 결말처럼 이유없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계의 레일은 서로 겹치는 일 없이 고안되었다는 오래된 낙서를 본적이 있지만. 충돌은 머지 않은 듯 했고. 나는 다시 레일의 방향을 바꾸려 육중한 그것을 탁탁 치기 시작했다.

하루 하루 다가오는 그 궤도의 속도와 방향 시간을 계산하며 불안에 떨었고 이어 다가올 심각한 충돌로 인해 끊어져버릴지도 모를 연결나사를 틀림 없이 조여나갔다. 한번도 벗어나본적 없는 이 궤도에서 빗겨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었고. 하루이든 이틀이든 잡아당길만한 지표 조차 의미없이 튕겨져 나갈 것만 같았다. 충돌은 흔적도 없이 나를 떨어뜨릴 테고 추락은 위와 아래를 분간할수 없이 공포스러웠다. 그렇게 부산하게 각자의 일에 열중해 있는 동안 너와 나의 간극에선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고 충돌이 임박했을때 우린 감각을 잃었고 소리를 잃었고 빛을 잃었다.

그러나, 너의 비명도 나의 비명도, 세계을 찢어놓을 충돌도, 불길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빛을 찾았고, 소리를 찾았고, 감각을 찾았다. 너는 너의 궤도를 그으며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원했던, 내가 원치 않았던, 우리에게 임박했던 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고. 다시 바꾸어보려 머리위에 레일을 두드려 보았지만 텅텅 무책임한 대답만 들려왔다. 다가가던 그 순간에도 멀어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너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레일은 그저 그렇게 처음부터 동그란 각자의 원을 긋고 있었던것 뿐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나의 레일을 두드리며 또 다른 너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