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즈막히 시간에 일어나 옥상에 올라간다. 올라가기만 했지 사실 '옥상'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면에는 한발자국도 내딛지 않았다. 폭이 좁은 문턱에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한대 피우며 앞 뒤로 끊임없이 중심을 잃는 무거운 몸뚱아리의 균형을 잡느라 종아리 근육을 피곤하게 사용했다. 종아리 근육 이외에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어떤 생각들이 앞 뒤로 균형 없이 다녀갔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
일어나자 마자 옥상까지 올라와서 꼭 담배를 피워야 하나?
오늘은 누가 들이닥칠까? 어딘가 나가야 하나?
아이 씨- 이 동네는 왠 전기 줄이 저렇게 많은 거지?
전기 줄은 꼭 무슨 몬스터가 잔뜩 뱉어 놓은 것처럼 창문을 가로질러 위에서 아래로 혹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도 이어져 있었는데.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 전선들은 가만 보니 죄다 초고속 인터넷 아니면 지역케이블 방송사의 것이 분명했다.
틀림없이, 전봇대에 매달려 선을 연결하던 케이블 회사 직원들도 이런 식의 지저분한 연결 방식은 거의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정도로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전문가 교육을 받았다면 적어도 선이 남는다고 해서 나머지 분량의 선을 돌돌 동그랗게 말아서 대충 전봇대 어딘가에 걸어두거나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잠시 동안 그런 식으로 도시 미관과는 전혀 무관하게 대강 걸어두고 묶어두고 하는 우리동네가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 건가 하며 탄식을 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마치 내가 전봇대에 대롱대롱 매달린 케이블 업체 직원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변론하고 있기도 했다.
지금이 일요일 저녁 8시쯤이라고 치자. 우리의 그 케이블 회사 직원이 전봇대 위에 오른다. 그는 대략 스물 다섯-에서 서른 사이로 이제 막. 전문가 과정을 수료하고 사회에 막 발을 내 딛은 사내이다. 마땅한 꿈은 없을지언정. 전기 배선에 대한 전문가 과정을 수료하면서 안정적이며 정돈된 배선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과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철학과 책임감이 그에게 어떤 자신감과 자존심으로서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의 그 케이블회사 직원은 취직해서 처음 전봇대에 오를 때에 어떤 희열까지 느꼈을지도 모른다.
지역 케이블 회사마다의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면서 매일 소화해야 회선의 숫자가 많아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회사측은 그 동안 설치해 온 수백 세대 분의 회선을 전부 업그레이드 하기로 결정하였고 우리의 그 케이블회사 직원은 몇 안 되는 다른 직원과 함께 어제부터 밤새도록 그렇게 오늘까지 쉼 없이 옥상과 전봇대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그는 정확히 백 쉰 다섯 번 째 전봇대에 올라가있다. 굵은 밧줄 사이로 힘없이 늘어진 엉덩이는 벌겋게 진물이 나올 정도로 닳고 달아있고, 어쩌면 눈치채지 못할 시간에 아예 바닥으로 추락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소싯적에 배웠던. 안전이나. 정돈된 배선 따위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직도 올라야 할 전봇대가 수 백 개가 남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백 쉰 다섯 번 째 전봇대에서 백 쉰 다섯 번 째 회선을 이제 막 연결하고 났더니 예상치도 못한 케이블이 수 미터 가량 남았다. 평소 같았으면. 적당한 길이로 정리하여 최대한 안전하고 깔끔하게 그 남은 부분을 갈무리 하고 내려 갔을 테지만. 그는 그 동안 나름대로 지켜왔던 소신 따위는 이제 포기해 버리고 싶었다. '이런 망할. 어떻게든 연결만 되면 되는 거 아냐?' 라고 어쩌면 아무도 없는 밤중에 그렇게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재미없지만 쓸데없이 케이블회사 직원 역을 자처해서 생각해보고 난 뒤엔 이미 담배가 필터까지 타버린 상태였지만. 좀처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가만 보니 엉키고 설킨 전깃줄은 밀림의 덩굴 따위를 떠올리게 했고. 건물 벽마다 무수히 제각각 붙어있는 전기 계량기는 버섯 군락을 연상시켰다. 갑자기 주거지 일색인 화곡동 일대가. 무섭도록 자라난 밀림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말하자면 한정된 어떤 생태계 내에서 각각의 생명체가 살아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펼쳐야 하는 무분별한 욕심과. 경쟁 그 야생의 의지 자체로서 말이다. 케이블 업체에 비유를 해보자면. 한시라도 빠른 시간에. 많은 회선. 즉 덩굴 을 하늘에 가득 채우는 일이. 하나의 생명 집단으로서 우위를 차지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필연적인 몸부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집단이 혹은 개인이 살아남기 위한 일에. 생태계 전체의 미관이나 다른 생명체의 불편 따위는 염두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 갑자기 인공조형물들에게 생명체의 번식 욕을 가져다 붙였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연유를 대강 추론 해 보건데, 가끔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 인간성 자체를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극도로 부인하고 싶어진다거나, 동시에 그런 본성들을 대놓고 폄하하고 싶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일종의 결벽, 혹은 강박들이 조금 부질없고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그 이유인 것 같다.
이성적이고 절제된 어떤 생각들이 좀더 세련되고 수준 높은 어떤 것이라는 관념 때문에 보지 못하거나 놓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따위. 또는 그런 관념들 때문에 살며 참고 또 참아야 하는 근심과 걱정 혹은 자기 희생이 얼만큼이나 될지 그 누구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매일같이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이런 망할, 어떻게든 연결만 되면 되는 거 아냐?' 라고 소리치고 싶은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화곡동의 주택가를 누비고 있는 저 난잡하고 혼란스러운 케이블들이 인간이 생명 자체로의 존재목적에 더 충실한 어떤 것이 아닌가 하는 조금 얼토 당토 않은 결론을 내려버리고는. 그렇게 머리를 긁적거리며 옥상을 내려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