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일정이 다가오면서 머릿속이 온통 작업을 마무리하는 데에 집중이 되어 있어서 그런지,요즘 아무 생각이 없다. 예전같으면 '아무 생각이 없다'는 상태가 곧 점점 더 멍청해지는 과정처럼 여겨져 불만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제 지금은 어쩌면 그런 상태가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이기때문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비로소 작업에 몰입하여, '무아지경'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림에 몰두해있기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아무 생각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러니까, 기록할만한 무언가가 없는 날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내 인생이 점점 더 짧아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또 슬금 끼어든다. 내가 이토록 '생각'에 집착하는 것은, 내 작업의 기반이 바로 그런 '생각'들이기 때문이다. 곧 죽어도 매일 똑같은 그림, 매월 비슷한 생각, 매년 그만그만한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되고싶지는 않다. 생각만해도 환멸스럽다. 그런 작가가 죄지 않기위해 늘 새로운 생각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 것일게다. 어릴적에는 내가 영원히 늘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감각을 느끼며,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들을 찾아내고 결국 항상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거라고 자신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살아보니 삶은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고, 늘 비슷한 삶 속에서 혁신적인 생각을 해내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요즘은 다짐한다. 매일 매일 아주 미세한 혁신을 이루자. 어제보다 아주 조금만,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조금씩만 발전하자. 그럼 언젠가 뒤돌아 보았을때 생각보다 멀리, 높이 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