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계획 된 일정도 아니었고, 급하게 야간열차 표를 구해 출발했던 북경. 필름 아홉 롤과 열 두 페이지의 메모.
북경이라는 도시에서 '이 곳에서는 무엇이든 정말 크고 넓구나' 라는 감탄 이외에 거대함에서 오는 숭고미崇高美 따위를 애써 찾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마에 '나는 자랑스럽다' 라는 말을 크게 써붙인 사람을 바라보는 것 처럼 직설적인 그들의 화법이 진부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수많은 전동 자전거와 덜덜거리는 삼륜차, 온갖 종류의 복스봐겐들이 한데 뒤엉켜 곡예를 하듯 달리던 알려지지 않은 북경의 뒷 골목 풍경이 더 마음에 들었다. 택시기사들은 중앙선을 넘나들며 가까스로 횡단하는 사람들을 피해 운전하면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8차선 대로를 무작정 건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불평도, 공포도, 각박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극도로 무질서한 가운데 느껴지는 무신경하고 무덤덤한 어떤 여유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박물관에 전시된 오래된 도자기와 금불상, 동양미술사 책에서나 보았을 법한 산수화들를 찾아보기도 했고 북경에 가면 꼭 봐야한다던 곳들을 둘러 보기도 했지만, 그저 '이것이 그것이로구나' 라는 짧은 단상 이외에 별다른 감흥도 느끼지 못해서 아쉬웠다. 아마도 내게 문화적, 역사적, 미적 소양이 기준 미달이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찬탄의 대상이라는 것이 내겐 어딘가에 엉뚱한 곳에 따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한적한 호숫가에 앉아서 하늘빛과 물빛이 같아서 끝이 보이지 않는 그런 풍경들을 반나절 동안 앉아서 바라 본다던가 북경동물원의 코끼리의 느린 진흙 목욕을 유심히 관찰 한다거나 겹겹이 하늘에 그어진 버드나무 잎들을 멀뚱하게 올려다 본다던가 하는 일이 내겐 더 매력적인 것이다. 아주 느리지만 끊임 없이 변하는 무엇을 지켜보는 일. 그런 것들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이 참 좋았다. 외치고 싶은 이름은 있지만 그 이름을 가진 누군가를 내 앞에 데려다 놓기엔 미안한 정도의 그리움.
처음 중국에 가기로 했을때, 짐을 싸면서 유일하게 가져온 책이 앙드레 말로의 <인간조건> 이었던걸 보면 이 곳에 와서 어떤 마음속의 <결단> 이라던가 <혁명> 따위가 일어나고 맺어지길 바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치기어린 바램이었다는 것은 알지만, 밤새 야간열차 위에서 잠을 설친 시간 만큼, 자금성에서 북경동물원까지 힘을 다해 걸었던 만큼, 가슴 속에서 뭔가가 맺어져 있거나 해결 되어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돌이켜보면, 그저 여기저기 무작정 걸어다니며 사진을 찍고, 아무데나 걸터 앉아서 뭐든 노트에 끄적거리는 짓은 서울에서나 북경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뭔가가 해결되지 않았거나, 맺어져 있지 않다 하더라도, 중국식의 무신경함과 무덤덤한 여유나 배짱 이라도 가지고 돌아가길 희망한다.
참 두렵다. 결국 어디든 항상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