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꼬박 새버렸다.
밤 새 그놈의 퀄리티 라는 이름을 가진 무형의 간수와 신경전을 벌이다가. 아침이 되면 <난 밤새 고생하였소> 라고 이마에다가 떡하니 써붙이고 나면, 퀄리티고 뭐고. 졸린 눈 비비며 출근하는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 자적 짐을 싸들고 괜스레 비장한 기분에 젖어 퇴근을 하게 된다. 아마 한 십년쯤 복역하던 죄수가 출감할때의 표정 쯤을 상상하면 되려나- 아침에 퇴근할 때엔 언제나 햇빛이 요란스럽게도 맑다.
햇볕이 좋으니- 지하철 보다는 버스가 낫겠다며 또 한사코 가까운 지하철 역을 지나 버스정류장 까지 걸어간다- 사실 쓰러질 만큼 피곤한 그런 상태도 아닌데 괜히- 무언가 전부 소진해버렸다는 기분이 들면 살짝 뭔지 모를 성스러운 감정이 생겨버린다.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과 기분들에 아무런 저항없이 몸을 맡기고 버스정류장에 앉아있다가 문득 그런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어떤 기분- 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듯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생각이라고 하기엔 좀 가볍다.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원하는 그런 기분. 그런 생각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또 다시 문득- 아주 짧은 추억하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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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삼년전-
아마도 여름 밤 이었던 것 같은데. 신사동 골목의 어떤 편의점 의자였던 것 같다. 같은 직장 동료 둘 과 함께 버드- 를 하나씩 입에 물고 있었고, 근처에 오래된 아카시아 나무라도 있었던 건지 어디선가 한가득 여름 밤 향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그 셋은 그다지 공유할 만한 화제가 없었던 터라, 그저 각자 속으로 히죽이며 옛일을 떠올리고 있었다거나, 우스운 기사거리를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기억해내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그저 살짝 눈을 감고 밤공기를 즐기며 머리속을 비우고 있었던것 같다. 그 때 옆에 앉은 동료가 불쑥 그 앞에 앉은 동료에게 물었다.
'A님 은 나중에 뭘 하고싶으세요?' 라고,
(뜬금없긴...!)
그 질문의 주인공은 평소에 좀 지나치게 센티멘틀 해지고 또 지나치게 그런 기분을 생색내려 들고 위로받고 싶어하는 개인적으로 좀 기피하는 스타일의 동료였고. 그 질문을 받은 A라는 사람은 비공식적으로만 나와 친분을 쌓고 있던 분이었다. 그런 식으로 셋이 모이고 그 중 둘이 공공연하지 않게 친한 경우, 겉보기엔 셋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것 같지만 사실 눈빛이든, 손동작이든, 혹은 기침소리 따위를 통해 모종의 보이지 않는 테이블이 따로 마련되기 마련,
'음... 음... 저는요 아무 것도 하고싶지 않는 그런...'
'목적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목적이에요.'
'네?.. 목적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목적이라구요?'
'어떤 의미인지 너무 어렵네요...'
'저는 말이죠-'
(목적은 다른데 있었군!)
어떤 대답이 나올까 내심 키득거리며 귀기울이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대답이어서 놀랬지만, 한편으로는 그 질문을 한 동료가 말을 잃고 블라블라 자기가 하고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떠들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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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엔- 사실 그 말의 의중을 알 수 없었고. 아마 지금도 그 친구가 말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내 입으로 그때 그 친구와 같은 말을 되뇌었다는 사실이 의미있는 것이다. 내가 무심코 뱉은 그말 '원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 은 아마도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은 채로 살고싶다..' 라는 뉘앙스 였던 것 같다.
그때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과 기분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었을까? 문득 지독하게 그 이야기를 그때 그분과 다시 나누고 싶었지만- 버스가 심하게 덜컹거리고, 갑자기 살짝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해서, 햇볕이 너무 눈부셔서, 버스에 사람이 너무 없어서, 졸음이 밀려와서, 그 런 생각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그렇게 말도 안되는 변명들을 늘어 놓으며 다른 상념들에 숨어 잊어버리도록 애를 써야했다.
안타깝지 않은가-
살다가 문득- 이렇게, 리얼타임이 아니라 일년이든 삼년이든, 한 참 뒤에서야 어떤것을 공감하게 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럴 때에 그때의 그사람과 다시 회자하여 그 이야기를 다시 나눌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거나 거의 없다.
왜냐하면,
노력하지 않는 상태이거나.
혹은 노력할 수 없는 상태이거나.
눈치채지 못할 사이에 이미 이만-큼 멀어져 있거나,
아니면 내가, 혹은 그 사람이 너무 변해 버렸을 거라 느껴지거나.